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온 왕국 (문단 편집) ==== 아스투리아스 왕조의 단절 ==== 999년 베르무두 3세가 통풍에 시달리다가 사망한 뒤, 아들 '''[[알폰수 5세]]'''가 레온 왕위에 올랐다. 당시 나이가 5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어머니 엘비라 가르시아와 가정교사를 맡고 있던 포르투갈 백작 [[멘도 곤살베스]]가 [[섭정]]했다. 1008년 14살이 되었을 때 성년으로 인정받아 친정을 시작했다. 통치 초기엔 어머니 엘비라 가르시아의 영향을 받아 카스티야 백국과 우호관계를 이어갔지만, 1014년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의 후원를 받던 바누 고메즈 가문이 레온 왕국에 반기를 들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1017년 3월 산초 가르시아가 사망하면서 입지가 약화된 엘비라는 오비에도의 어느 수도원에 은거한 후 그 해에 사망했다. 알폰수 5세는 산초 백작이 사망한 뒤 지도자 선출에 난항을 겪고 있는 카스티야 백국을 침공해 케아 강과 피수에르 강 사이의 영토(현재 팔렌시아 지방)을 장악했다. 당시 [[후우마이야 왕조]]는 기독교 세력을 상대로 맹공을 펼치던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1002년 사망한 뒤 내란에 휩싸여 있었다. 알폰수 5세는 이 때를 틈타 알 만수르의 침략으로 파괴된 레온 시를 재건하고 행정 체계를 개편하는 등 파탄에 빠진 국가를 되살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017년 레온 대성당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푸에로 데 레온(Fuero de León, 레온 헌장)>이란 제목의 법률을 공포했다. 군주의 권한과 종교적 규제를 적시한 20개 계율에 레온 시의 생활을 규제하는 28개 계율이 결합된 이 법령은 레온 왕국 최초의 성문법으로서 기능했다. 20여 년간 왕국의 질서를 회복하고 군대를 육성하는데 힘을 기울인 알폰수 5세는 1028년 포르투갈 지역의 비세우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해 8월 7일 공성전을 지휘하던 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이후 레온 왕위에 오른 '''[[베르무두 3세]]'''는 11살에 불과했기에, 계모이자 [[나바라 왕국|팜플로나 왕국]] 국왕 [[가르체아 2세 사노이츠]]의 딸인 우라카가 [[섭정]]했다. 그러나 알폰수 5세가 레온 헌장을 반포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제한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이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루고 백작 오베코 루린데스가 먼저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고 그의 재산은 루고의 주교에 넘겨졌다. 오르비고, 갈리시아, 아스토르가 등 레온 왕국의 동부 영역에서도 그의 권위에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팜플로나 국왕 [[안초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레온 정부는 이를 막을 여력이 없었다. 1029년, 우라카 왕비는 팜플로나 왕국이 레온 왕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산체스와 베르무두 3세의 누이인 산차의 결혼을 약혼을 주선했다. 그런데 가르시아 산체스가 결혼식을 치르러 레온으로 향했다가 카스티야에서 추방됐던 귀족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르시아 산체스가 후손을 두지 못한 채 죽자, 팜플로나 국왕 안초 3세는 시 카스티야 백작령을 점거한 뒤 자신의 아들이자 죽은 백작의 조카인 페르난도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세워서 카스티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했다. 이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의 바로 위에 있는 차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국경 지대를 점령하고, 전임 백작을 살해한 레온 왕국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어 레온으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췄다. 1032년 중반 15세의 나이에 친정을 시작한 베르무두 3세는 안초 3세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누이 산차와 안초 3세의 아들 [[페르난도 1세|페르난도 사노이츠]]의 결혼을 주선하고 안초 3세가 빼앗아간 영토를 '지참금'으로 가지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안초 3세는 얼마 안가 레온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고, 1034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과 사모라, 아스토르가 등을 함락시키고 베르무두 3세를 갈리시아로 축출한 뒤 스스로 레온 국왕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레온과 아스토르가를 비롯한 레온 왕국의 동쪽 영역은 팜플로나 왕국의 영역에 들어갔고, 베르무두 3세는 오직 갈리시아 일대만 다스렸다. 1035년 10월,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일대를 모조리 석권하며 '히스파니아의 렉스(Hispaniarum rex)'를 자칭하던 안초 3세가 사망했다. 그가 건설한 왕국은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장남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는 팜플로나 국왕이 되었고, 차남 페르난도 사노이츠는 카스티야 백작을 맡았으며, 삼남 온잘루 사노이츠는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왕이 되었다. 베르무두 3세는 이 때를 틈타 레온 시를 탈환했지만, 안초 3세의 아들들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안초 3세의 딸 히메나 사노이츠와 결혼했다. 그러나 1037년, 카스티야 백작이자 매형인 페르난도 사노이츠는 그를 몰아내고 레온 국왕이 되기로 마음먹고 팜플로나 국왕이자 자신의 형인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와 연합하여 레온 왕국으로 진격했다. 1037년 9월 4일, 양군은 타마론 계곡에서 맞붙었다. 베르무두 3세는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던 중 전투의 열기에 지나치게 휩쓸린 나머지 적진에 무리하게 침투했다가 적병들에게 에워싸이고 말았다. 그는 곧 낙마했고, 창에 16번 찔러 사망했다. 베르무두 3세는 생전에 안초 3세의 딸 히메나 사노이츠와 결혼하여 아들 알폰수를 낳았지만, 알폰수는 며칠 만에 사망했다. 이리하여 아스투리아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히메네스 왕조가 레온 왕국의 새로운 지배 가문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